대풍헌
우리땅을 지키기 위해 바람을 기다렸던 사람들 - 수토사

대풍헌(待風軒)이란?
경상북도기념물 제165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풍헌은 바람을 기다리는 집이라는 의미로 조선시대 구산포(邱山浦)에서 울릉도로 가던 수토사(搜討使)들이 순풍(順風)을 기다리며 머물렀던 수토 출항의 기점이다. 울진 구산포 앞바다에서 동해의 난류와 한류가 만나 울릉도와 독도 방향으로 흘러 나가기 때문에, 이곳은 배를 띄우기에 적합했던 지정학적 위치라 할 수 있다.
- 수량/면적 : 1동(56.46 제곱미터)
- 지정(등록)일 : 2010.03.11
- 소재지 : 경상북도 울진군 구산봉산로 105-2
- 시대 : 철종 2년(1851년) 중수
대풍헌

- 대풍헌에는 각종 문서가 남아있었는데 수토사 일행의 경비를 조달하는 내역이 담긴 ‘완문(完文·1871)’ ‘수토절목(搜討節目·1883)’ 등이 있다.
- 또한 당시 상황을 알려주는 현판(1851∼1906년 시기)도 다수 걸려 있다.
- 이 가운데 1910년 이전에 만들어진 현판 12점은 조선 조정이 19세기에도 지속적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실질적으로 지배, 관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 현판 목록 「箕城龜山洞舍」1점(1851년),「待風軒」1점(1851년),「邱山洞舍重修記」1점(1851년),「永世不忘之板」6점(1870∼1878년),「邱山洞舍記」1점(1888년),「洞稧完文」1점(1904년),「重修記」1점(1906년)
- 대풍헌 건물은 1851년 3월2일에 입주 상량하였고 원래는 마을회관으로 사용되었다가 수토사 일행이 순풍을 기다리며 숙소로 사용하면서 대풍헌으로 불리게 되었다.
1851년 6월에 건물을 중수하고 게판하였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기성구산동사
기성구산동사는 대풍헌의 다른 이름이다
기성은 평해의 옛 이름이고, 구산은 마을 이름이다.
현판은 대풍헌 건물 오른쪽 상단에 걸려있고, 원래부터 구산동 마을회관으로 사용하였다. 대풍헌 현판보다 이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구산동사중수기

구산동사중수기는 1851년 6월에 제작된 현판으로 월송만호가 울릉도 수토의 명을 받들어 행하던 곳이다.
현판의 내용은 동사가 낡아 새로 중후하는 과정과 동사를 새로운 이름인 대퐁헌으로 지은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평해군수 심능무, 이윤흡 영세불망지판
평해군수 심능부, 이윤흡 영세불망지판은 삼척영장과 월송만호가 2~3년 간격으로 울릉도를 교대로 수토할 때마다 동에서 경비를 부담하여 피해가 컸는데, 심능무가 평해군수로 부임하여 70금을 수토 비용에 사용하라고 주었고, 이윤흡 평해군수도 권복 15결을 수토비용에 보충하라고 주었기에, 이에 현판을 제작하여 두 군수의 덕을 기린다는 내용이다. 제작시기는 上之七年庚午七月日로 되어있는데 심능무의 평해군수 재임시기(1865~1867), 이윤흠의 평해군수 재임시기(1867~1868)로 보아 上之七年庚午는 고종 7년, 즉 1870년 임을 알 수 있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월송만호 장원익 영세불망지판

장원익은 1866년(고종 3) 12월20일에 월송 만호로 임명되었으며, 1867년 4월 울릉도를 수토하였다.
장원익이 울릉도 수토 때에 구산동민들의 어려움을 듣고 20금을 수토에 보태 사용하라고 주었는데, 그 돈을 ‘수토보용전’이라 했다. 그 후 주민들이 그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현판을 제작하여 게판한다는 내용이다.
현판은 庚午 七月이라는 간지로 보아 1870년(고종 7) 7월에 제작한 것이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평해군수 이용익 영세불망지판
평해군수 이용익 영세불망지판은 울릉도 수토 때마다 구산진에서 그 비용부담으로 고생하는 것을 평해군수 이용익이 알고 이를 근심하여 100금을 균역소에 내어 주어 그 여자를 취하여 수토비용에 보태게 하였다. 이에 구산동민이 그의 덕을 기리고자 현판에 새겨 동사(대풍헌)에 게판하였다는 내용이다. 현판의 제작시기는 1871년(고종 8) 4월(同治 十年 辛未 四月)이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이방 황지해 영세불망지판

이방 황지해 영세불망지판은 구산동에서 격년으로 울릉도를 수토할 때 비용이 100금이나 소비되는 등 어려움이 많았는데, 영찰 황지해가 30금을 보태었기에 그 은혜를 기린다는 내용이다. 그동안 이 현판의 주인공을 ‘월송명장 황공’으로 보아왔으나, ‘영찰 황지해’로 파악되었다.
황지해는 앞의 평해군수 이용익 영세불망지판(1871. 4)에서 동일 이름이 확인되는 이방 황지해로 추정된다.
현판 제작 시기는 1872년(고종 9) 8월(同治 十日年 壬申 八月)이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전임 손주형, 손종간, 손수백 영세불망지판
전임 손주형, 손종간, 손수백 영세불망지판은 갑신년 당시 1년 간격으로 울릉도 수토가 있었는데, 구산동에서 제공하는 비용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심하자 전임 손주형이 석두세를 마을에 주어 극심한 고통이 사라졌으며, 족질 손종간, 손자 손수백도 함께 도움을 주었으므로 그 은혜를 기록한 것이다. 현판 제작 시기는 1878(고종 15)이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구산동사기

구산동사기 현판은 구산동이 1888년 당시 수토 때에 부역을 담당하였는데, 당시 안택규와 김석빈의 노고를 칭송하여 기록한 것이다.
현판 제작 시기는 1888년(고종25)이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수토사 연표

(출처:수토문화전시관)
동해안수군(東海岸水軍)
동해에는 삼국시대부터 이미 수군이 있었고,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신라는 선부(船府)를 두었고, 고려시대에는 선병도부서(船兵都部署), 사수시(司水寺)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세종 대에는 수군이 완전히 정규군으로 편제되어 각 도별로 수군절도사를 두고 예하부대를 배치하였다.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는 강포구(고성), 속초포(양양), 연곡포(강릉), 삼척포(삼척), 수산포(울진), 월송포(평해) 등 6개 만호영(萬戶營)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1510년 삼포왜란을 계기로 삼척포진성은 1520년, 월송포진성은 1555년에 축성되었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삼척포진성(三陟浦鎭城)
현재 강원도 삼척시 정상동 육향산 일대에 위치한다.
삼척포성이라고도 불리며, 1520년(중종 20)에 둘레 900척, 높이 8척으로 축조하였다. 오십천 하구(河口)일대의 자연적인 포구가 삼척포 수군의 기항지로 이용되었다.
본래 조선시대 수군은 배위에서 근무하는 선상수어(船上守禦)가 원칙이었으나 점차 안정적인 주둔지가 필요하고 또 긴급한 사태에 대비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수군진에도 축성이 추진되었다. 강원도 동해안 지역 수군진은 삼포왜란을 전후하여 삼척포를 비롯하여 월송포, 울진포 등에 축성되었다.
삼척포진성에는 청사(廳舍)와 군고(軍庫), 화약고(火藥庫) 등이 있었고, 성문은 동문과 서문이 있었다. 포진(浦鎭)의 아사(衙舍)는 1898년에 화재로 불타 없어졌고, 대한제국기의 군사 개편으로 삼척포진영도 폐지되었다. 그 후 1916년 정라항을 새로 축조할 때, 이 진성을 헐어 없애고 도로와 주택지로 조성하게 되면서 현재는 그 옛 모습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삼척영장(三陟營將)
영장(營將) 제도는 1627년(인조 5) 『영장절목(營將節目)』을 제정하고 무신 정3품 당상관을 전임(專任) 영장으로 임명하는 것에서 시작되엇다. 삼척영장은 1672년 삼척첨사가 겸임하고, 영동지방 9개 읍의 군병을 관장하였다.
특히 1694년(숙종 20)부터 월송만호와 교대로 울릉도를 수토하는 책임자가 되어 일본인의 불법적인 어로행위나 벌목 등을 차단하였다. 당시 삼척영장으로 울릉도 수토를 한 장한상은 수토과정과 울릉도에서의 조사 내용을 상세히 기록한 『울릉도사적(鬱陵島事蹟)』을 남겼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월송포진성(越松浦鎭城)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에 있는 조선시대 수군 병영진성이다. 책임자는 대개 4품관으로 임명되는 만호(萬戶)였다. 월송포에 정식으로 만호가 배치된 것은 1397년(태조6년) 삼척, 간성진을 설치한 이후일 것으로 보고 있으나 수군 주둔지로서 월송포가 운영된 것은 그보다 앞선 시기이다.
월송포는 당시 강원도에 설치된 6개소의 수군만호진 가운데 하나였으나 세종 초기에 포구에 모래가 쌓여 병선 정박이 어렵게 되자 일시적으로 폐지되었다.
그 후 1510년 삼포왜란을 계기로 월송포진성은 1555년(명종 10)에 둘레 489척, 높이 7척의 석축성으로 축조되었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월송만호(越松萬戶)
만호(萬戶)는 고려, 조선 시대 외침 방어를 목적으로 설치된 관직으로, 본래는 그가 통솔하여 다스리는 민호(民戶)의 수에 따라 만호, 천호, 백호 등으로 불리다가 차차 민호의 수와 관계없이 진장(鎭將)의 품계와 직책 등으로 변하였다.
월송만호는 조선초기 수군진으로 정식 편제된 월송포수군진의 지휘관으로 초기에는 평해지군사(平海知郡事)가 겸직하던 것을 1419년(세종 1)에 별도로 만호를 두도록 하였다.
그러나 월송포구에 모래가 쌓여 병선 정박이 어렵게 되자 일시적으로 월송포진을 폐지하였으나, 1444년(세종 26)에는 관찰사 건의에 따라 다시 별도의 만호를 두었다. 그 후 1694년(숙종 20)부터 19세기말까지 삼척호 영장과 교대로 울릉도를 수토하였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월송정(越松亭)

월송정은 관동팔경(關東八景) 중의 하나로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 박원종(朴元宗, 1467~1510)이 연산군 때(1495~1506)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안축(安軸, 1282~1348)의 『취운정기(翠雲亭記)』(1331)에 의하면, 1312년(고려 충선왕 4)에 기록되고 있어 그 전에 이미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월송(越松 月松)이라는 유래는 이곡(李穀, 1298~1351)의 『동유기(東遊記)』(1349) 기록이 가장 오래되었다. 『동유기』에는 “소나무 만 그루 가운데에 월송정(越松亭)이 있는데, 사선(四仙)이 유람하다가 우연히 이곳을 들리지 않고 지나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라 하였다. 이외 신라시대 네 명의 화랑이 이곳에서 노닐며 쉬었다거나, 어떤 사람이 중국 월(越)나라의 소나무(松)를 가져와 심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밝은 달(月 )이 떠올라 소나무(松) 그림자가 비추었기 때문에 유래되었다는 이야기 등 여러 설이 전해온다.
특히 조선시대 성종(成宗) 임금이 전국의 활터에 있는 정자(:사정 射亭) 중 경치가 가장 뛰어난 곳을 그리게 하였는데, 이때 월송정이 뽑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소나무에 둘러싸여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어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유서(由緖) 깊은 곳이다.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월송정 그림(1738)을 보면 석축으로 쌓은 돈대 위에 누각이 있는데 문루(門樓)의 형태인 것으로 보아 월송정은 울릉도 일대까지 해방(海防) 경비를 관장하던 월송포진성의 성문 구실도 겸하였음을 보여준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