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토사
우리땅을 지키기 위해 바람을 기다렸던 사람들 - 수토사

수토사(搜討使)란?
완문(完文)
조선시대 관부에서 일반 백성들에게 어떤 사실을 알리거나 특전을 부여할 때 발급하는 문서 수토에 수요되는 각종 비용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평해군수가 구산동에 발급해 준 것 완문의 내용은 삼척영장과 월송만호가 수토할 때 그 비용을 구산동과 주변 8개 동에서 함께 마련하게 하였으나 그 폐해가 구산동에만 집중되자 평해 관아에서는 120냥을 각 동에 분배하고 1냥에 3푼 이자를 받아 수토할 때 비용으로 쓰라고 하였다. 완문에는 신미칠월일(辛未七月日)로 되어 있는데 신미년은 1811년(순조11)으로 추정된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수토절목

수토는 ‘수색하여 토벌한다’는 뜻이고 절목은 수토 때 지켜야 할 12조항을 적은 것 수토적목이 작성된 계미(癸未)년은 1823년(순조23)이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상량기문
종도리 뜬장혀
종도리 장혀1
종도리 장혀2

수토사(搜討使)의 임무
1. 당시 울릉도와 독도에는 주민의 거주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섬에 몰래 들어가 숨어 사는 사람이 있는가를 수색하는 주민 쇄출 임무
2. 일본인이 불법으로 와서 벌목, 어업활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를 살피는 왜인 탐색 임무
3. 울릉도의 지세를 살피고 토산물과 산삼을 채취하여 진상하는 지세 파악과 토산물 진상의 임무 등 수토사에게는 3가지 임무가 주어졌다.
울릉도 수토(搜討)의 역사
조선 조정에서는 2~3년마다 울릉도와 독도에 수토사를 파견해 수토정책을 실시했다. 울릉도 수토는 1693년 어부 안용복 사건이 계기가 되어 숙종 때인 1694년 장한상을 최초의 수토사로 파견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이후 고종 때인 1894년까지 200년간 이어졌다고 한다.
울릉도 수토는 삼척영장과 월성만호가 교대로 수행하였는데 한 번에 80∼150명 규모의 수토사를 편성해 진행하였다. 뱃길이 멀고 험해 실제로 항해 중에 풍랑을 만나 수토사들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울릉군 서면 태하리 해변의 바위벽 등지에는 수토사들이 남긴 각석이 여럿 존재한다.
수토사들의 기록에 따르면 울진 구산포항 대풍헌에서 출발해 울릉도까지는 하룻날 하룻밤이 걸렸다고 한다. 실제 대풍헌에서 울릉도 태하리까지는 직선거리로 144km인데 오늘날에도 순풍이 부는 날에 무동력선을 이용하면 최소 19시간 이상이 소요된다고 한다.
안용복 사건
안용복은 조선 후기 어부로, 1693년 울릉도에서 조업하던 중 일본 어부들에게 납치된다. 당시 안용복은 에도 막부를 상대로 울릉도와 독도에서 행해지는 일본의 불법 어업에 항의하고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주장하며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이후에도 일본의 불법 고기잡이가 끊이지 않자 1696년 다시 일본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재자 확인하게 되는데 대마도의 개입으로 일본에서 추방돼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온다.
수토사 연표

(출처:수토문화전시관)
동해안수군(東海岸水軍)
동해에는 삼국시대부터 이미 수군이 있었고,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신라는 선부(船府)를 두었고, 고려시대에는 선병도부서(船兵都部署), 사수시(司水寺)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세종 대에는 수군이 완전히 정규군으로 편제되어 각 도별로 수군절도사를 두고 예하부대를 배치하였다.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는 강포구(고성), 속초포(양양), 연곡포(강릉), 삼척포(삼척), 수산포(울진), 월송포(평해) 등 6개 만호영(萬戶營)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1510년 삼포왜란을 계기로 삼척포진성은 1520년, 월송포진성은 1555년에 축성되었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삼척포진성(三陟浦鎭城)
현재 강원도 삼척시 정상동 육향산 일대에 위치한다.
삼척포성이라고도 불리며, 1520년(중종 20)에 둘레 900척, 높이 8척으로 축조하였다. 오십천 하구(河口)일대의 자연적인 포구가 삼척포 수군의 기항지로 이용되었다.
본래 조선시대 수군은 배위에서 근무하는 선상수어(船上守禦)가 원칙이었으나 점차 안정적인 주둔지가 필요하고 또 긴급한 사태에 대비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수군진에도 축성이 추진되었다. 강원도 동해안 지역 수군진은 삼포왜란을 전후하여 삼척포를 비롯하여 월송포, 울진포 등에 축성되었다.
삼척포진성에는 청사(廳舍)와 군고(軍庫), 화약고(火藥庫) 등이 있었고, 성문은 동문과 서문이 있었다. 포진(浦鎭)의 아사(衙舍)는 1898년에 화재로 불타 없어졌고, 대한제국기의 군사 개편으로 삼척포진영도 폐지되었다. 그 후 1916년 정라항을 새로 축조할 때, 이 진성을 헐어 없애고 도로와 주택지로 조성하게 되면서 현재는 그 옛 모습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삼척영장(三陟營將)
영장(營將) 제도는 1627년(인조 5) 『영장절목(營將節目)』을 제정하고 무신 정3품 당상관을 전임(專任) 영장으로 임명하는 것에서 시작되엇다. 삼척영장은 1672년 삼척첨사가 겸임하고, 영동지방 9개 읍의 군병을 관장하였다.
특히 1694년(숙종 20)부터 월송만호와 교대로 울릉도를 수토하는 책임자가 되어 일본인의 불법적인 어로행위나 벌목 등을 차단하였다. 당시 삼척영장으로 울릉도 수토를 한 장한상은 수토과정과 울릉도에서의 조사 내용을 상세히 기록한 『울릉도사적(鬱陵島事蹟)』을 남겼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월송포진성(越松浦鎭城)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에 있는 조선시대 수군 병영진성이다. 책임자는 대개 4품관으로 임명되는 만호(萬戶)였다. 월송포에 정식으로 만호가 배치된 것은 1397년(태조6년) 삼척, 간성진을 설치한 이후일 것으로 보고 있으나 수군 주둔지로서 월송포가 운영된 것은 그보다 앞선 시기이다.
월송포는 당시 강원도에 설치된 6개소의 수군만호진 가운데 하나였으나 세종 초기에 포구에 모래가 쌓여 병선 정박이 어렵게 되자 일시적으로 폐지되었다.
그 후 1510년 삼포왜란을 계기로 월송포진성은 1555년(명종 10)에 둘레 489척, 높이 7척의 석축성으로 축조되었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월송만호(越松萬戶)
만호(萬戶)는 고려, 조선 시대 외침 방어를 목적으로 설치된 관직으로, 본래는 그가 통솔하여 다스리는 민호(民戶)의 수에 따라 만호, 천호, 백호 등으로 불리다가 차차 민호의 수와 관계없이 진장(鎭將)의 품계와 직책 등으로 변하였다.
월송만호는 조선초기 수군진으로 정식 편제된 월송포수군진의 지휘관으로 초기에는 평해지군사(平海知郡事)가 겸직하던 것을 1419년(세종 1)에 별도로 만호를 두도록 하였다.
그러나 월송포구에 모래가 쌓여 병선 정박이 어렵게 되자 일시적으로 월송포진을 폐지하였으나, 1444년(세종 26)에는 관찰사 건의에 따라 다시 별도의 만호를 두었다. 그 후 1694년(숙종 20)부터 19세기말까지 삼척호 영장과 교대로 울릉도를 수토하였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월송정(越松亭)

월송정은 관동팔경(關東八景) 중의 하나로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 박원종(朴元宗, 1467~1510)이 연산군 때(1495~1506)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안축(安軸, 1282~1348)의 『취운정기(翠雲亭記)』(1331)에 의하면, 1312년(고려 충선왕 4)에 기록되고 있어 그 전에 이미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월송(越松 月松)이라는 유래는 이곡(李穀, 1298~1351)의 『동유기(東遊記)』(1349) 기록이 가장 오래되었다. 『동유기』에는 “소나무 만 그루 가운데에 월송정(越松亭)이 있는데, 사선(四仙)이 유람하다가 우연히 이곳을 들리지 않고 지나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라 하였다. 이외 신라시대 네 명의 화랑이 이곳에서 노닐며 쉬었다거나, 어떤 사람이 중국 월(越)나라의 소나무(松)를 가져와 심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밝은 달(月 )이 떠올라 소나무(松) 그림자가 비추었기 때문에 유래되었다는 이야기 등 여러 설이 전해온다.
특히 조선시대 성종(成宗) 임금이 전국의 활터에 있는 정자(:사정 射亭) 중 경치가 가장 뛰어난 곳을 그리게 하였는데, 이때 월송정이 뽑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소나무에 둘러싸여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어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유서(由緖) 깊은 곳이다.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월송정 그림(1738)을 보면 석축으로 쌓은 돈대 위에 누각이 있는데 문루(門樓)의 형태인 것으로 보아 월송정은 울릉도 일대까지 해방(海防) 경비를 관장하던 월송포진성의 성문 구실도 겸하였음을 보여준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월송정(越松亭)
수토사(搜討使)의 편성


울릉도검찰일기
이규원의 검찰 일기는 1882년 4월7일~5월27일까지 기록하였고 그 중 4월30일부터 5월11일까지 울릉도 검찰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내용은 본토 주민들이 들어와 정착하여 살고 있는 것을 서술하고 있으며, 취락의 규모와 지명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울릉도에 와 있는 조선인은 대략 140여명이었다.
그리고 일본인 78인이 들어와 무단 벌목하고 있는 사실도 기록하고 있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이규원의 생애
이규원의 본관은 전주, 자는 성오(星五), 시호는 장희(莊僖)이다. 이규원은 무과에 급제한 후 1882년(고종 19) 울릉도 검찰의 명을 받고 울릉도 섬 전체를 시찰하고 돌아와 『울릉도검찰일기』를 남겼다. 1884년 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로 임명된 이래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박석창의 수토기록
삼척영장 박석창이 1711년 울릉도를 수토하고 남긴 기록으로 ‘울릉도 도형’과 신묘명 각석문이 남아있다. 울릉도 도형에는 울릉도의 둘레를 200여리, 동서 80여리, 남북 50여리를 기록하고 있다. 바닷가에 길게 대나무 밭이 있으며 소위 ‘우산도(于山島)’라 부른다고 하였다.
또한 신묘명 각석문에는 날짜, 수토내용, 수토관 및 수행원들을 이름 순으로 새겨넣었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월송만호(越松萬戶)
만호(萬戶)는 고려, 조선 시대 외침 방어를 목적으로 설치된 관직으로, 본래는 그가 통솔하여 다스리는 민호(民戶)의 수에 따라 만호, 천호, 백호 등으로 불리다가 차차 민호의 수와 관계없이 진장(鎭將)의 품계와 직책 등으로 변하였다.
월송만호는 조선초기 수군진으로 정식 편제된 월송포수군진의 지휘관으로 초기에는 평해지군사(平海知郡事)가 겸직하던 것을 1419년(세종 1)에 별도로 만호를 두도록 하였다.
그러나 월송포구에 모래가 쌓여 병선 정박이 어렵게 되자 일시적으로 월송포진을 폐지하였으나, 1444년(세종 26)에는 관찰사 건의에 따라 다시 별도의 만호를 두었다. 그 후 1694년(숙종 20)부터 19세기말까지 삼척호 영장과 교대로 울릉도를 수토하였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울릉도 도형

(출처:수토문화전시관)
김창윤의 수토기록

1786년 김창윤의 수토는 장한상이 1697년에 처음 수토하고 기록한 『울릉도사적』에 기재된 지명보다 상세히 기록하였다. 4박5일 동안 저동, 죽암마을(천저구미), 태하동(황토구미)을 택하고 있으며 경로는 저동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김창윤의 수토경로에서 태하동에서 사동에 이르는 지금의 서면 일대인 남서 해안은 대부분 제외되었다. 내륙 수토는 저동, 도동과 태하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한창국의 수토기록
1794년에 거행한 한창국의 수토는 기간이 4박5일로 김창윤과 동일하나 경로가 다르게 진행되었다. 김창윤이 서면 일대를 제외한 반면 한창국은 전 해안을 일주하면서 수토를 진행하였다.
한창국은 지금의 태하동을 중심으로 수토를 진행하였고, 저동과 통구미에서 각 1박을 하였으며 출항지는 통구미이다. 내륙을 수토한 곳은 태하일대, 통구미, 저동, 죽암 일대이며, 도동 내륙의 수토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장한상(張漢相) 수토의 시작
장한상의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자는 필경(弼卿), 호는 운암(雲巖)이다.
장한상은 의성의 비안현에서 출생하였다. 1676년(숙종 2) 무과에 급제하였고, 1678년 선전관(宣傳官)을 시작으로 희천 군수(熙川 郡守), 자산 군수(慈山 郡守), 태안 군수(泰安郡守) 등 내외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1693년 제1차 안용복 사건 직후, 1694년(숙종 20) 장한상은 삼척 첨사(三陟 僉使)로 임명되었을 때 울릉도 수토사로 파견되었다. 장한상은 1694년 9월에 출발하여 울릉도 일대를 조사하였고, 10월에 돌아와 울릉도를 상세히 기록한 『울릉도사적』을 남겼다. 1694년, 장한상의 수토를 시작으로 1894년까지 정기적으로 실시되었다. (출처:수토문화전시관)
울릉도사적(鬱陵島事蹟)

수토선 모형


